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색 작전 (문단 편집) ==== B집단군의 공세 ====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Stalingrad-04.jpg|wideth=75%]] > 그것은 내 눈으로 본 동방 지역 중에 가장 적막하고 구슬픈 곳이었다. 덤불과 나무 한 그루 없고 몇 마일을 가도 마을 하나 없는 메마르고 생기 없는 불모의 초원이었다. -독일군 생존 병사의 증언[*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228] 여기도 소련군에게는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7월 23일 돈 강을 향해 전진하는 B집단군은 거침 없이 드넓은 초원을 지나 진격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항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숙한 부대들의 미숙한 공격은 독일군에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전진은 계속되었다. 7월 23일 고르도프 장군은 62군과 64군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1탱크군과 4탱크군은 6군에게 반격을 가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51군의 저항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호트의 4기갑군이 8월 2일 돈 강을 건넜다. 6군은 스스로 돈 강을 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남쪽에서 올라오는 4기갑군을 기다리기로 한다. A집단군의 4기갑군은 캅카스 점령이 마무리 되자,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동원되었고, 파울루스는 8월 19일까지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드디어 파울루스의 6군은 8월 23일 돈 강을 건넌다. 이때부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편집증적 집착이 시작된다.[* 히틀러는 '스탈린의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다른 소련인보다 훨씬 더 "공산주의적"이라 판단하고 판단하고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보낸다'''"고 공언했다.]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상징성이 히틀러를 사로잡았고,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독일의 승리 '신화'에 보탬이 될거라고 여겼다. 문제는 스탈린도 똑같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스탈린도 도시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물자를 쏟아넣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의 공업생산력[* 소련 군수생산의 4분의 1을 담당했으며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의 주요 생산기지가 여기 있었다.]이나, 볼가강의 전략상 중요성도 한 몫 했다. 볼가강은 러시아를 관통하는 강으로 모스크바 뒤쪽으로 돌아흘러 들어갔으며, 볼가강의 수호는 우랄산맥 서안의 수운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볼가강의 수운이 차단되면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위시로 한 캅카스의 자원이 소련 본토로 도달하지 못하고, 이는 소련 전체 공업의 마비를 의미했다. 다른 생필품을 렌드리스에 거의 의존하고, 무기생산에 모든 걸 쏟아부은 소련의 공업이 마비되면 그것은 독일군에게 유일하게 우세한 물량에서의 패배를 의미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그라드의 점령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이 원한 것은 볼가강의 경제적 가치이다. 이는 외곽에서의 전투와 항공 폭격만으로도 충분했고, 볼가강 차단은 다른 곳에서도 가능했다. 시가지에 독일군 병사들을 갈아넣기보다는 벌판에서 기갑군으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스탈린그라드 점령의 원동력은 그것의 이름외에는 별로 없었다.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는 전후에 "스탈린그라드를 결정적 지점으로 보지 않았고, 독일군에게 지도에 있는 이름에 불과했다."고도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 지옥이 펼쳐질 재료들은 이제 다 준비가 되었고, 두 군대가 충돌할 일만 남아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